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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관계의 역사 국제관계의 역사 (1) 1900~1945
    국제정치학/국제정치학 총론 및 역사 2022. 10. 25. 17:22

    개요

      1900~1945년은 엄청난 변혁으로 점철되어 있음. 1900년은 근대 국제사회의 분석에 편리한 출발점. 하지만 반드시 가장 유용한 것은 아님.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은 진정한 20세기는 몇몇 강대국들이 세계의 문제를 좌지우지하던 19세기 현상유지를 일거에 타파시켜버린 격변의 전쟁과 함께 1914년에야 시작됐다고 주장(Hobsbawm 1994: 3).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유럽은 지배적인 국가들 대부분이 연루된 대전을 한 세기 동안 경험해보지 못함. 세계의 그토록 많은 나라와 인민들이 전란을 경험한 적은 결코 없었음. 이 전쟁은 진정으로 하나의 '세계대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인구가 총동원된 19세기 최초의 '전면전(Total War)'이기도 함.

    전면전(Total War)
      전쟁의 규모가 지구적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전투병들이 상대방을 '무조건 항복'시키려 한다는 의미도 내포. 또한 승리를 위해서 건장한 모든 시민들 소집하여 군대를 만든다는 측면에서 전 인구를 동원한다는 뜻도 가짐(여성도 준군사조직의 일원이자 준의료활동 종사자로서 공장과 민간 방위체에서 일하게 함).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는 엄청났음. 4년간의 전쟁이 끝난 후 강화를 위해 1919년 베르사유에 모인 외교관들과 정치인들은 전후 문제뿐만아니라 전쟁의 재발 또한 방지하기 위해 노력함. 하지만 이 베르사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이 있은 지 불과 20년 만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 이 전쟁은 이전의 전쟁보다 범위에 있어서 더 지구적이었음.

     

      따라서 1900~1945년은 인류사에서 가장 파괴적인 시간으로 기록됨. 그 어떤 기간보다 수많은 인간들의 대량학살이 발생했고, 강제수용소부터 원자폭탄까지 더 잔인할 수 없었음.


      1945년의 세계는 해체의 이야기가 압도적임.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터키, 러시아 제국은 붕괴됨, 외세의 침략에 중국 제국 또한 내전에 접어듦. 또한 국제 경제는 1929년 월스트리트 공황(Wall Street Crash) 이후 붕괴됨. 잇따른 불황은 부분적이지만 1930년 민주주의가 와해되는 원인이 됨.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일본, 라틴아메리카의 수많은 나라에서 극우 독재정권이 등장. '전간지(inter-war period)'라 불리우는 이 혼란한 세원의 끝은 새로운 세계대전의 시작이었음.

     

      20세기 전반에 일어난 지구적으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유럽의 총체적 붕괴. 1900년의 세계는 경제적으로 번성하고 인구가 번창한 몇몇 유럽 국가들이 형성한 지구 대부분을 포괄하는 제국들이 지배했으나, 1945년이 되자 미국과 소련이라는 새로운 두 '초강대국'이 국제문제의 주심 역할을 하는 세계로 대체됨.

     

      거듭된 전쟁으로 일시적이나마 유럽은 폐허가 되고 부채 더미에 쌓였으며, 동부와 중부 유럽은 소련의 점령하에 놓였음. 제2차 세계대전은 특히나 유럽의 해체를 한층 심화시킴. 하지만 이는 수십 년 묵은 문제를 악화시킨 것일 뿐. 많은 역사가들의 관점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제1차 세계대전의 연장이었음. 유럽은 '20년의 위기(Twenty Year Crisis, 1919~1939년 기간에 대한 E.H. Carr의 표현; Carr 1939)'를 겪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뿌리가 1870년대까지 뻗어 있는 일종의 '30년 전쟁(Thirty-Year War)'을 치른 셈.


    제1차 세계대전

      이 기간동안 유럽이 영향력을 상실한 원인은 일부는 유럽 자체에, 일부는 유럽 밖에 있음. 유럽 국가들은 서로 경계하며 적대적 싸움을 벌임. 하지만 산업 혁명을 낳고 지구 금융 활동의 중추였던 대륙도, 급속도로 산업화하는 국가들(대표적으로 미국)의 경제적 도전에 직면하게 됨. 또한 극동에서는 일본이 20세기 초 급격한 산업화를 진행하면서 동아시아 내 서부 열강들이 누리던 무역과 식민지 이익에 도전하는 경제-군사 세력으로 등장함.


    첫 번째 뿌리, 독일 문제

      내부적 뿌리는 종종 1870년대까지 뻗어 있음. 이 시기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이 누린 상대적 안정이 단일 통일독일의 수립으로 깨어지는 때. 통일된 독일의 영토 야심은 곧 분명해짐.

     

      통일 전 독일, 1871년까지 독일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로 존재하지 않았음. 독일은 크기가 작은 지자체부터 약 3,000만의 인구를 가진 경제-군사 강국 '프러시아', 인구 550만의 두 번째로 큰 '바바리아'에 이르기까지 25개 국가들의 집합체였음. 게다가 일부 게르만인들은 다른 국가 주권하에 놓임. 일부는 프랑스의 알자스-로렌(Alsace-Lorrain)에, 일부는 덴마크의 슐레스비하-홀슈타인에 거주함.

     

      이러한 국가들을 결합시키고 게르만인이 거주하는 '외국'의 땅을 병합하는 일은 프러시아의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bon Bismarck)의 몫이었음. 그는 독일의 통일을 공고화하고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프러시아의 지배력을 확립하기 위해 세 차례의 전쟁을 치름. 이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둘러싼 덴마크와의 전쟁(1864), 오스트리아-헝가리아와의 전쟁(1866), 알자스-로렌을 둘러싼 프랑스와의 전쟁(1870).

     

      결국 독일은 통일을 이뤄냈고, 근대사에서 처음으로 유럽의 중앙부가 단일의 광대한 국가에 의해 지배됨. 1913년 기준 6,700만에 이르는 독일의 인구는 러시아 다음으로 두 번째로 많았음. 또한 독일은 신속히 산업화되었고, 1870년까지만 하더라도 영국에 많이 뒤처져 있었던 석탄, 철 및 철강 생산은 1914년 영국을 능가함. 또한 1871년부터 1914년까지 독일의 농업생산은 2배, 공업생산은 4배, 그리고 해외무역은 3배 이상 증가함.

     

      이 때문에 영토, 인구, 군사 및 산업상의 힘을 확보하게 된 독일은 자신감을 얻고 해외 팽창력을 갖게 . 따라서 기존의 유럽 세력 균형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통일 독일의 탄생은 '독일 문제'의 생성을 야기함. 게다가 다른 국가들은 독일이 영토 확장을 위해 지리 전략상의 중심부의 위치와 경제자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동맹을 맺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음.

     

      결국, 독일 팽창주의의 확대에 대한 비스마르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의 후계자들은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음. 결과적으로 이들은 강대국의 가장 중요한 상징인 '해외 제국'의 지위를 획득함으로써 여타 강대국들과의 격차를 좁히기 위해 노력함.

     

      따라서 '제국 논쟁'은 1914년 전쟁 발발의 중요한 요인. 전쟁의 기원에 대한 마르크스 주의의 해석에 따르면 으뜸의 요인.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은 세계 최강의 무역국가라는 자국의 지위가 독일에 의해 위협받는 것을 원치 않음. 따라서 독일과 해군 경쟁에 몰입. 프랑스 또한 독일의 팽창을 두려워하면서, 20세기 초반, 독일의 확고부동한 기도를 저지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 제정 러시아 사이에 예기치 못한 동맹이 생김.

     

      그러나 독일은 자신을 침략자로 생각하기보단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제국주의 체제의 피해자로 인식. 세계 시장은 이미 동맹을 형성한 국가들 사이에서 그들만의 배타적 만족을 위해 분할되어 있었음. 아프리카, 아시아, 중동은 영국과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었고, 중국에는 러시아와 일본, 라틴아메리카는 미국이 장악함.

     

      따라서 식민지를 획득하는 것은 독일로서는 위신이나 지위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 사활의 문제였음. 이제 다투어야 할 주된 무대는 1906년과 1911년 영국과 프랑스가 모로코를 놓고 충돌했던 북아프리카와, 독일이 베를린과 바그다드 간의 철도를 건설하려 했던 중동 아시아였음.

     

      제국주의(imperialism), 민족주의(nationalism), 유럽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의 와해 등, 여러 가지 설명 요소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역사 서술상의 많은 논쟁이 재생산됨. 주로 '전쟁이 어느 정도까지 계획된 것인지' 혹은 '예기치 못한 다양한 연쇄 반응의 나비효과인지'가 대표적인 논쟁거리.

     

      일부 역사가들은 '전쟁 범죄'는 독일만의 몫이라는 전승국의 판결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보임. 이 견해에 입각한 가장 저명한 설명은 1961년 출간된 프리츠 피셔(Fritz Fischer)의 '세계 강국을 향한 기도(Griff nach der Weltmacht)'. 이 책은 전쟁 중 독일이 경주했던 병합 노력이 얼마나 컸는가를 강조하고, 독일은 그 추구하는 바를 위해 의도적으로 전쟁으로 치달았다고 주장.

     

      다른 역사가들은 전쟁의 발발은 계획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우연적 측면이 많다고 주장하고, 군사계획의 수립방식에 부분적인 원인을 돌림. 알프레드 폰 슐리펜(Alfres von Schlieffen) 백작이 구상한 독일의 전략은 독일이 프랑스와 러시아를 상대로 이중의 전선에서 전쟁을 치를 것을 감안해 수립됨. 따라서 그의 계획은 동원 늦은 러시아의 군대를 상대하기 전에 먼저 프랑스에 대해 결정적 일격을 날리는 것. 이 '슐리펜 계획(Schlieffen plan)'대로라면 전쟁이 급속도로 확대되는 것은 당연지사였음.

     

      하지만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총격은 의외로 독일이 아니라,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에 의한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 대공(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왕위 계승자)이 암살당한 사라예보(Sarajevo)에서 시작됨.


    두 번째 뿌리, 동방 문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유럽 불안정의 또 다른 원인은 서서히 붕괴되어가도 있던 오토만 제국(Ottoman Empire)으로부터 비롯된 이른바 '동방 문제(Eastern Question)'. 유럽의 주도국들은 발칸 지역으로부터 중동에 이르는 권력 공백이 어떻게 채워지는가에 대해 지대적 관심을 가짐. 그러나 오토만 왕조가 다스렸던 인민들 또한 민족주의 시대에 자치권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함.

     

      이 때문에 발칸에서는 서로 경쟁하고 있던 민족 집단들이 여러 유럽 강국의 지원하에 일련의 전쟁을 벌이며 충돌하고 있었음. 결과적으로 (마찬가지로 붕괴 직전 상태였던) 제정 러시아 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1914년 사라예보 사건 이후 러시아의 친구인 세르비아의 슬라브 인들을 위협하는 것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음. 이 때문에 국지적 사건에 그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전면적으로 발화됨.

     

      이전 20년 동안 형성된 복잡한 동맹체제는 한편으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로 재편됨. 이에 따른 전쟁은 4년간 지속되었고, 전쟁의 대부분은 군사적 교착상태로 특징지어짐. 치열했던 이 전쟁은 '참호전(trench warfare)'으로 집약됨.

     

      이 전쟁은 수많은 유럽 젊은이들의 목숨을 앗아갔고, 1917년 미국이 참전하면서 유럽 제국들이 식민지 군대들을 사용하게 되면서 사상자는 먼 대륙에서도 나타남.


    강화, 1919 : 베르사유 전후처리

      전쟁이 남긴 것은 수백만의 인명과 재산 피해. 기력이 쇠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토만 제국 역시 전쟁의 피해자, 제정 러시아는 볼셰비키 혁명(Bolshevik Revolution)으로 붕괴. 전승국들의 경제 또한 4년간의 긴박한 전면전의 결과, 패전국 못지않게 피폐해짐. 여러모로 전면전은 완전 승리를 요구했고, 적을 완전히 패배시키는 것은 자국 역시 거의 황폐화되는 것을 그 대가로 함.

     

      특히 번번이 전쟁터가 되었던 프랑스가 입은 참화는 강화 대표들이 논의할 의제에 처벌적 차원을 덧붙이게 함. '국내 재건을 위해 독일로부터 어떻게 배상을 받아낼 것인가?', '무엇보다 어떻게 해야 독일이 다시는 유럽 지배를 모색하지 않을까' 등 유럽의 문제들이 갖는 난해함과 승리한 연합국들의 다양성에 비추어 강화 대표들은 전후 질서 형성에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함.

     

      주요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전쟁 책임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봄으로써 혹독한 평화안을 정당화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서로 견해가 달랐음. 그러나 강화 회의를 지도하는 세력은 미국의 대통령이었음.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의 '14개 조항(Fourteen Points)'

      미국은 전쟁 종반부인 1917년 참전. 하지만 공식적인 참전에 앞서 서구 열강들에 대해 점차 지원을 강화함. 전후 질서의 재건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할 요량으로 윌슨 대통령은 전후 평화를 건설하기 위한 일단의 '원칙들(principles)'을 제시함. 전반적 비전은 정치적으로 확산된 주권국가 원칙에 의존하면서 '자유무역'과 '시장 자유화'를 장려하는 것.

     

      14개 조항은 국제 외교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요구함. 특히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공개적인 조약(open covenants, openly arrived at)'이란 제1차 세계대전 후 어느 나라가 어떤 영토를 획득할 것인가를 놓고 국가들이 사적으로 여러 가지 거래를 하는 낡은 방식의 비밀 외교를 대체하려는 시도였음.

     

      또한 '집단안보(collective security)' 원칙에 기초한 국제기구를 창설함으로써 장차 전쟁이 훨씬 잘 방지될 것이라 믿음.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구상이 전제로 하는 것은, 국제 평화를 위협하는 어떠한 위협도 궁극적으로 자신들 모두를 위협하는 것이고, 따라서 집단적으로 대처해야 할 공격행위로 간주하는 '평화를 애호하는' 회원국들의 존재임.

    집단안보(collective security)
      국제연맹의 기본 원칙으로, 회원국들은 한 회원국(그리고 보다 더 일반적으로는 국제규범)에 대한 위협이나 공격을 자신들 모두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는 것.

     

      게다가 이상적으로 본다면 국제연맹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공격적인 국가들은 팽창적인 행동을 단념해야만 함. 따라서 국제연맹은 포스트 1919 세계의 특징 중 하나임. 이는 영구적인 구조와 성문화 된 헌장을 가진, 분쟁을 중재하는 국제기구를 창설하려는 최초의 공식적인 시도였음. 비록 1930년대 제2차 세계대전 침략국들에 대해 단호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는 불명예에도 불구하고, 연맹은 1945년 국제연합의 모델이 됨.

    윌슨의 '14개 조항'의 요점
    1.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공개적인 평화조약, 즉 국제 외교의 공개적 수행.
    2. 해양 항행의 절대적 자유 보장.
    3. 가능한 한 모든 경제 장벽의 철폐.
    4. 국내 치안에 필요한 최저 한도까지의 군축 착수 및 이의 보장.
    5. 관계 주민의 이익은 수립될 정부의 공평한 주장과 동등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원칙하에서 모든 식민지 요구를 자유롭고 개방적 자세로 공평하게 조정.
    6. 모든 러시아 영토로부터의 철별 및 러시아와 관련된 모든 문제의 처리.
    7. 벨기에로부터의 철병과 그 회복.
    8. 프랑스의 영토로부터의 철병과 그 회복, 또한 알자스-로렌의 프랑스 반환.
    9. 명백히 승인될 수 있는 민족 분계선에 따라 이탈리아 국경을 재조정.
    10. 오스트리아-헝가리 인민들에 대한 자치적 발전의 기회 부여.
    11.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에서의 철병, 세르비아에 해양 진로 보장, 발칸 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의 국제적 보장.
    12. 오토만 제국의 터키인 지역에 대한 확실한 주권 보장, 그 밖의 민족에 대한 자치적 발전 보장, 다르다넬스 해협의 영구 개방.
    13. 독립 폴란드의 수립과 해양에 대해 자유롭고 확실한 진로 보장.
    14. 모든 국가의 정치독립과 영토보전을 상호 보장하기 위한 국가 간의 일반적 연합 구성.

    자결 :  새로운 국가들의 탄생

      윌슨 대통령의 국제 집단안보기구의 창설 주장만큼이나 중요한 게 '민족자결(national self-determination)' 원칙. 다만 "각 민족에게 각자의 국가를"이라는 말은 표면상 내세운 이상에 불과. 그의 견해는 이론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모순적인 측면이 매우 많았음. 

    자결(Self-determination)
      각각의 민족은 자신의 주권 국민 국가에 대해 자치를 향유할 수 있다는 것.

     

      '새로운 국제기구가 민족들을 위해 이 원칙을 재가한다면 그 민족은 과연 누구인가', 민족을 '피와 땅'에 뿌리를 둔 것으로 보는 유기적이고 근본주의적인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민족성의 경계가 어디 있는지는 자명해지지 않음. 또한 '국민의 자격(citizenship)'은 누구에게 부여되는가', '둘 혹은 그 이상의 민족들이 동일한 영토에 대한 주권을 역사적 소명으로 주장한다면 그 경계는 어떻게 누가 조정해야 하는가' 등등 수많은 문제점이 산재. 예를 들어 1919년 최초로 탄생한 체코슬로바키아는 무솔리니(Mussolini)가 "체코-게르만-폴란드-마자르-루테니아-루마니아-슬로바키아"라고 조소한 것처럼 다수의 민족으로 구성됨.

     

      이처럼 윌슨의 자결 주장은 유럽에서 그 복잡한 인종 현실에 비추어볼 때 문제가 해결되는 만큼 많은 모순을 드러냄. 즉 6,000만 인구가 자신들의 국가에 속하는 대신 2,500만의 인구는 불완전한 국민국가들 속 소수민족으로 살아가게 됨. 남부, 동부 및 중부 유럽의 새로운 국가들(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등)은 인종적 차이뿐만 아니라 허약한 경제와 미숙한 정치 제도를 감수해야만 했음.

     

      이 때문에 독일은 상대적으로 방어력이 약한 주변국(국가적 허약함)들에 둘러싸임. 그럼에도 강화 대표들이 윌슨의 자결 주장에 반대하지 않은 이유는 독일의 재부상보다 볼셰비즘레닌(Lenin)이 새로 창조한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반(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 USSR, 소련)으로부터 서유럽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두려워서였음.

     

      레닌은 소비에트 혁명이 세계 혁명, 모스크바가 지도하는 국제공산당(Communist International: Comitern)의 출범으로 앞당기게 될 역사적 필연의 시작일 뿐이라고 공언함. 그뿐만 아니라 전쟁의 결과, 서유럽에서 공산당이 자랄 토양이 형성된 것으로 보였으며, 소련은 이 공산당들에 개입해서 세계 혁명의 수단으로 이용할 수도 있었음.

     

      따라서 볼셰비즘에 대한 두려움이 민족 자결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 정치가들의 열의를 설명. 결국 이 새로운 국가들은 핀란드, 발틱 공화국, 폴란드, 루마니아처럼 과거 러시아에 속한 땅에서 만들어진 관계로 궁극적으로 반소비에트적일 수밖에 없었음. 이들 국가들은 소련에 대한 바람직한 '검역대(quarantine belt)'였음.

     

      하지만 반대로 유럽 안보에 대해 독일이 던지는 위협을 문제 삼지는 않음. 이에 따라 1차와 2차의 전간기는 동맹을 구축하고 조약을 체결하는 또 다른 시기였음.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1925년 이후의 이탈리아는 중부 및 동부 유럽의 여러 국가에 대해 국경이 침공당할 경우 행동을 취할 것을 약속하는 등 '안전 보장'을 확대함.

     

      안타깝게도 윌슨의 민족자결에 대한 열정이 유럽에서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반면, 백인이 아닌 다른 인종에게 적용되는 것은 관심이 없었음. 보편적 이상으로 칭송받게 된 자치(self-rule)의 실시는 유럽인들에게만 국한됨. 미국이 이후 아이티 군사 점령(1915~1940)을 지속하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필리핀을 식민지로 계속 지배하는 등, 카리브 연안 및 중앙아메리카에서 군사력 사용을 강화한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음.

     

      윌슨이 자치 역량이 없다고 판단한 민족들, 특히 과거 아프리카의 독일 식민지들과 중동지역들은 국제연맹의 위임통치(Mandates)를 받게 됨. 이는 이름만 다를 뿐 식민지와 다름없었음. 관할 주체가 패전국에서 승전국으로 바뀌었을 뿐, 중동의 주요 지역들은 오토만 제국의 형태를 지닌 초국가적(transnational) 이슬람 거버넌스라는 마지막 형태도 사라지게 되자 한층 침략적인 유럽의 지배하에 놓임.


    독일의 장래

      강화 대표들은 독일의 운명을 결정지을 때 자결 원칙을 엄격히 적용하지 않음. 프랑스는 알자스-로렌 지역을 되찾고 석탄, 철, 철강 등을 획득하기 위해 독일 서부의 주요 산업지역인 자르(Sarr)를 점령. 또한 프랑스의 군대는 조약에 따라 독일의 무장해제를 위해 라인란트를 점령함.

     

      또한 다시 생긴 폴란드에 독일 민족이 포함된 것은 독일 정치인들과 대다수 독일 국민들은 분개함. 폴란드는 18세기 이래 독립국가로 존재하지 않았으나, 이제 동프러시아를 광대한 독일 본토로부터 갈라놓음. 이러한 변칙적 상황은 폴란드가 단치히(혹은 그다인스크) 항구를 통해 해양 출구를 가져야 한다는 강화 대표들의 믿음에서 비롯됨.

     

      결국 1919년 영토 처리에 따라 독일은 영토의 13%와 거의 700만의 인구를 잃어버림. 이는 독일 민족들의 잠재된 불만이 되었고, 이는 1930년대 히틀러(Hitler)가 이끈 국가사회당원들을 선동하는 빌미가 됨. 하지만 이보다 가혹한 일은 독일의 '전쟁범죄(war guilt)'를 조약에 명기한 것.

     

      전승국들이 전쟁범죄 조항을 만든 것은 독일에 대한 강제 배상을 정당화하기 위함. "독일이라는 레몬을 씨까지 짜내도록" 프랑스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가 이러한 입장을 강력히 견지함. 비록 프랑스가 주장한 만큼은 처벌 수준은 아니지만 영국 총리 로이드 조지(Lloyd George) 역시 배상은 독일이 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

     

      독일이 정확히 얼마를 배상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베르사유에서 결정되지 않음. 합의에 실패한 연합국들은 이 문제를 배상위원회로 넘김. 그리고 궁극적으로 총액은 계속 경감됨. 이들이 독일을 경제적으로 파멸시키려 했던 이유(선거에서의 인기, 장차 독일의 전면전 감행 능력 박탈)는 쉽게 이해되지만, 지혜로웠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남음. 실제로 조약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논박의 대상이 됨.

    배상(Reparations)
      패전국들이 전쟁이 끝난 후 자신들을 이긴 승전국들에게 갚아야 하는 빚을 말함.

     

      1919년 취리히에서 열린 한 여성 국제회의는 이러한 전후처리가 "유럽 전체에 장차 전쟁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 불화와 적개심을 야기"할 것이라 예견함(Pettman 1996: 109). 또한 다소 다른 시각이지만 영국의 베르사유 대표단의 조언자를 맡았던 저명한 경제학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는 '평화의 경제적 결과(The Economic Consequances of the Peace)'라는 제목으로 강화조약에 대한 일종의 무게 있는 고발장을 발표. 케인스는 독일의 몰락이 유럽 전체의 회복을 저해할 것이라는 강력한 논지를 제기함. 독일은 유럽 경제엔진의 모터였기에, 연합국들은 자신들이 받은 전쟁의 고통을 연장시킨 것일 뿐이었음.

     

      요컨대, 프랑스의 포슈(Fosh) 장군이 조약 체결 이후 예리하게 지적했듯, 베르사유가 가져온 것은 평화가 아니라 단지 20년 간의 정전에 불과했음. 유럽의 근본적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케인스의 추론에 따르면 전후처리는 독일에 너무 가혹했으며 유럽 전체에 대해서도 가혹했음. 따라서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의 기간 동안 유럽의 경제적 위상은 순전한 수혜국으로 부상한 미국의 경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한층 더 약화됨.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으로부터 엄청난 부채를 지게 되었고, 윌슨은 이를 갚도록 요구함.

     

      그뿐만 아니라, 점차 많은 비독일 민족도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 민족에게 정당한 분노를 물려주었다는 견해에 어느 정도 공감하게 됨. 이 점은 영국 정부가 1930년대 유화정책을 추구했던 것을 부분적으로 설명해줌. 그러나 다른 추론 방식에 따르면(그중에서도 역사가 테일러(A. J. P. Taylor)의 해석), 베르사유 전후처리의 진정한 문제는 그것이 '충분히 가혹하지 못했다'는 점.

     

      독일이 유럽 심장부에 여전히 가장 큰 단일 국가로 존재하는 한 '독일 문제'는 해결된 것이 아니었음.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독일의 잠재력 또한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음. 결국, 어느 관점에서 보든지(특히나, 적어도 조약의 유지에 전적으로 헌신할 그 어느 주요 강대국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베르사유 조약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었음. 

    미국과 소련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20년간 소극적 행동을 한 이유

    미국의 경우,
    1920.3           
    미 상원이 베르사유 조약의 비준을 거부, '전쟁범죄' 조항이나 국제연맹에 관한 사항을 포함시키지 않은 채 1921년 독일과 개별적으로 강화조약을 체결함. 미국은 일본의 진주만 공습 때까지 고립 외교정책 기조를 유지함. 그러나 미국 정부는 많은 국제문제, 특히 군축과 안보 관련 문제에 관심을 가졌음. 그리고 전통적으로 관심을 두어온 태평양 지역의 문제에 민감했는데, 이곳에서는 일본이 부상하고 있었음.
    1921~1922    워싱턴 군축회의는 태평양에서 일본의 세력 팽창 문제의 처리 방식으로 주목됨.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각각의 해군력은 상대적으로 5:5:3:1.75:1.75로 정해짐. 중국의 주권은 보장되었으며 중국과의 무역 '개방(Open door)' 정책이 유지됨.
    1931              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한 미국의 관심은, 1931년 일본이 중국 북부의 만주지방을 점령함으로써 시작된 '만주 위기(Manchurian crisis)'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분명해짐. 미국은 국제연맹의 회원국은 아니었으나 이 위기의 원인을 밝히는데 협력함. 그러나 일본의 침략을 되돌리기 위한 무력의 사용을 촉구하지는 않았음. 세계에 대한 미국의 영향은 외교 분야보다 경제 분야였음. 미국은 독일의 재건을 도왔고, 이로 인해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에 배상금을 지급했으며, 영국과 프랑스는 다시 미국에 채무를 갚을 수 있었음.

    소련의 경우,
    1917.11         볼셰비키 혁명으로 마르크스-레닌 정치체제가 이전 제정 러시아에서 권력을 장악.
    1918.3           레닌 또한 혁명의 공고화에 집중하기 위해 독일과 별개의 평화조약을 체결. 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영토의 4분의 1, 인구의 3분의 1을 독일에 넘김.
    1918~1920    혁명이 공고화되기 전에 내전이 발발함. 트로츠기(Trotsky)의 붉은 군대는 백러시아의 반혁명군을 몰아냄. 반혁명군은 프랑스, 영국, 일본 및 미국의 간섭과 원조를 받는 상황이었음.
    1924               요시프 스탈린(Josef Stalin)이 레닌의 뒤를 이어 권자에 앉고 일국사회주의 건설에 매진.
    1929               소련경제의 제1차 5개년 계획이 도입. 스탈린은 농업 집단화와 함께 산업에 관한 국가계획을 가속화.
    1936~1938     스탈린은 자신의 독재 반대세력에 대해 대대적 숙청을 단행.
    1939.8            스탈린은 나치 독일과 불가침 협정을 체결. 이는 소련 외교정책에서 이제 이데올로기의 역할이 얼마나 미미해졌는지 방증. 대신 소련의 안보 이해가 증대되었고, 이 조약은 발틱의 소련 땅을 보장하고, 반대로 소련은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을 양해함.

    지구 경제 불황, 1929~1933

      새로운 세기가 열리자마자 미국은 영국이 차지했었던 '지구 경제의 중추적 위치'를 차지. 1902년 유럽인들은 이미 '미국의 침공(American invasion)'에 대해 말하고 있었음. 국내 시장을 독점한 미국의 기업들이 해외의 새로운 시장을 향해 나아갔고, 미국 금융가들 역시 잉여자본의 투자처를 찾고 있었기 때문. 1914년이 되면 미국의 해외 직접 투자는 미국 GDP의 7%에 달하게 됨. 이는 1966년과 같은 비율에 해당함(Arrighi 1994: 241).

     

      1929년에 이르러 미국은 세계 산업생산의 42%를 창출한 반면, 독일, 영국, 프랑스의 생산은 모두 합해서 28%에서 불과했음(Hobsbawm 1994: 97). 또한 지구 자본주의의 패권이 영국으로부터 미국으로 이동한 것에 수반하여 경제적 상호 연관성 역시 심화됨.

     

      1910년 노먼 에인절(Norman Angell)국제질서(international order)가 전례 없는 수준으로 통합되었다고 단언함. '경제적으로 개화된 세계(economically civilized world)와 '신용 및 상업 계약(credit and commercial contract)'이 서로 결합한데 따른 주장이었음. 1929년 10월 29일 월스트리트 주식 붕괴는 전후 경제회복이 지닌 취약성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대공황이 대부분의 세계에 참화를 입힘으로써 에인절의 단언이 지닌 진실성도 증명함(Hopkins 2002: 35).

     

      경제사가들의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의 근본 원인은 계속 논쟁거리임(Hobsbawm 1994: 86). 하지만 대공황이 지구적 영향을 미쳤다는 데는 논쟁의 여지가 없음. 미국의 차관이 동 나고,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무역이 급작스럽게 침체되며, 소비자들의 가처분 소득 감소와 해외시장 소멸에 따라 제조업이 퇴조됨. 이는 대량실업을 낳았고, 사회복지제도가 국가와 시민 사이의 사회계약으로 광범위하게 수립되기 전까지 실업은 수백만 인구의 완전한 궁핍과 심각한 가난을 의미했음. 

     

      게다가 고용상태에 있는 사람들 또한 초인플레이션에 하룻밤 사이에 저축을 날렸고, 바이마르 독일에서 보듯이 궁극적으로 화폐가치의 상실로 이어졌음. 사치품, 식료품 및 원자재를 생산하는 국제무역에 참가하는 모든 국가들 또한 서양의 수요 급감에 타격을 입음. 예시로 일본의 실크 생산 농부들은 실크 스타킹의 구매가 중단되자 생계가 곤란해졌고, 지구 남반구에 위치한 곡물 생산업자들 역시 곡물 가격의 수직하락을 맛보았음. 브라질의 커피 재배업자들은 커피 가격의 붕괴를 방지하고자 브라질 철도회사들에 석탄 대체연료로 커피를 팔기도 함.

     

      이러한 영향으로 세계경제의 지구화가 지연됨. 발전해오던 자유무역체제 대신, 오히려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은 자신들의 국민경제를 변덕스러운 국제시장으로부터 되도록이면 고립시키려 했으며, 가능한 자립경제를 추구함. 따라서 보호주의 정책과 높은 관세장벽에 자유무역은 포기되면서, 국제무역 총액은 급속히 감소. 보호주의를 주도했던 미국은 다른 선진 산업국들보다 해외 의존도가 낮아 또 한 번 비교적으로 수혜국이 됨.

    경제자립 정책(Autarky)
      자급자족할 수 있는 국민경제를 추구하는 것. 대공황의 결과, 일부 국가들이 자국의 경제를 불안정한 지구 상품 시장과 해외 차관으로부터 격리시키려는 의도로 추구됨.

     

      그리고 이 경제 위기는 심각한 정치 불안을 수반함. 대공황만으로 1933년 히틀러의 권력 장악을 설명하는 것은 지나치게 원론적인 주장이 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 붕괴에 따른 인적 비용은 1930년대 극단주의적 정치형태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음은 틀림없음.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한 히틀러는 국경지역, 특히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나치 운동을 선동함. 한편, 무솔리니는 1930년대 이탈리아에서 '파시스트 국가(Facist State)'를 건설했으며, 스페인에서는 프랑코(Franco)가 자신에 대항하던 인민전선(Popular Front)을 패배시킴. 그러나 보다 급진적이거나 종종 인종차별적인 정치형태의 출현은 비단 유럽의 현상만은 아니었음.

     

      라틴아메리카에서도 1930년대 몇몇 정치체제가 와해되어 좌와 우 사이의 한 체제로 대체됨. 식민지 세계의 민족주의 운동 역시 대공황에 의해 강화됨. 그 예시로 인도에서 간디(Gandhi)는 영국 지배에 대한 시민 불복종 운동을 전개했고, 프랑스 치하의 인도차이나에서는호찌민(Ho Chi Minh)이 지도하는 공산주의 민족주의자들은 궁극적으로 1945년 이후 미국과 프랑스 모두를 상대로 하는 전쟁으로 이어질, 독립에의 대장정에 들어섬.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

    아시아-태평양에서의 기원

      유럽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유럽의 현상으로 보는 경향이 있고, 미국인들은 전쟁이 1941년 겨울에 시작되었다고 주장함. 하지만 실제 전쟁은 1939년 가을 이전 이미 아시아에서 진행되고 있었음. 아시아와 유럽의 갈등이 어떻게 '세계대전'으로 합쳐지기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중국에서의 전간기의 사태 발전에 대해 밝혀야만 함.

     

      20세기 초 몇십 년간 아시아에서 일본의 처지는 독일의 처지와 몇 가지 점에서 비슷. 독일은 급소한 근대화와 산업화를 겪었고, 제국의 확장을 꾀했으나 실패, 전승국들이 부과한 처벌적 대우는 자존심에 타격을 줌. 따라서 베르사유 조약의 핵심사항들을 반전시켜야 한다는 '개정 주의(revi-sionism)'이 대두됐고, 이는 대공황으로 강화됨. 그렇게 독일은 극우 정치체제하에서 대외팽창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고, 지리적으로 인접한 국가들의 취약성에서 활로를 찾음. 이러한 사정의 많은 부분이 일본과 동일.

     

      일본의 '메이지 유신', 메이지 황제의 재위 기간(1868~1912) 동안 일본의 통치자들은 서유럽과 북미로부터 모델을 빌려와 급속한 산업화를 추구. 이는 사회 및 정치의 근대화와 함께 진행됨. 농경 봉건제도가 폐기되고, 군대의 재편과 징병제의 도입 그리고 이에 따른 사무라이 계급의 해체, 교육과 해외여행의 장려, 새로운 의회제의 수립 등이 이루어짐. 게다가 독일처럼 19세기 말 일본 지도자들은 제국주의 성향을 키워나감.

     

      하지만 독일과 달리, 일본의 영토에는 산업화에 필요한 부존자원이 풍부하지 않았음. 하지만 두 나라 모두 급속히 증가하는 인구는 조만간 국가의 지리적-재정적 부양능력을 추월할 것으로 예상함. 이에 히틀러가 독일 민족의 활동공간(Lebensraum)을 중부 및 동부 유럽에서 찾았다면, 일본을 가장 적합한 팽창 공간으로 중국을 노림. 독일이 이웃 제국들(오스트리아-헝가리, 터키, 러시아)의 쇠퇴로 득을 본 것처럼 일본의 팽창주의 역시 중국이 처한 소멸 직전의 상태와 조선의 혼란한 상태를 십분 활용함.

     

      중국은 19세기 말 가까스로 주권국가로 남았지만, 연안도시들의 관할권은 외국과 상업 세력에 강제로 할양됨. 1911년 마지막 황제가 쫓겨나면서 중국은 내전에 빠져듬. 지방 군벌들이 서로 싸우는 동안, 쑨 원(Sun Wen), 후에 장제스(Jiang Jieshi)가 지도하는 국민당마오쩌둥(Mao Zedong)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과 충돌함. 중국 공산당은 1949년 최종 승리자가 됨. 아무튼, 국내 혼란과 강력한 중앙정부의 부재는 외국 '모리배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함.

     

      특히 영국은 19세기에 대중국 무역에서 가장 독점적인 지위, 시장을 강제로 개방시키기 위해 중무장한 군함을 사용. 20세기 시작할 무렵, 제정 러시아 역시 북부 중국에 철도를 부설하는데 깊이 관여함. 반면 미국은 점차 중요해지는 세력이었음. 미국은 중국이 '개방(Open Door)' 정책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함. '개방'은 중국 시장에 접근하려는 모든 외국 열강에게 동등한 통상의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지 특정 항만도시나 성(province)에서 단일 국가의 독점적 특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님.

    '문호 개방' 정책('Open Door' policy)
      문호 개방의 추구는 1900년 이래 미국이 취한 대중국 외교정책의 목표. 이익이 많은 중국 무역에 참여하려는 모든 외세에 똑같이 문호를 열어주고 상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 그러나 이와 함께 보다 넓은 의미로무역관계에 있어 불균형한 이익을 추구하려는 미국 외교의 전조로 받아들여지기도 함. 여기에는 종종 자신보다 경제적으로 힘이 약한 국가들이 만든, '자유무역'을 막는 장벽을 무너뜨리는 일도 포함.

     

      결국, 팽창 가능성에 대한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1904~1905년 러시아와 충돌함. 이 전쟁에서 러시아는 패배, 근대시기 유럽의 강대국이 아시아 국가에 처음으로 패배한 사례로 남음. 또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은 독일에 대항해 싸우며, 이를 기회로 중국에서의 독일의 이권을 편취함.

     

      비록 독일에 대항해 싸웠지만, 일본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베르사유 전후처리에 불만을 가짐. 일본은 인종평등의 원칙을 조약에 명기하려 애썼으나 실패함. 서방 열강들이 실제 일본인에 대해 인종적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미국의 1924년 이민법에 의해 확인됨. 이 법은 궁극적으로 일본인의 미국 이민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았음. 또한 일본 정부는 전쟁 중 맡았던 일본의 역할에 비해 합당한 영토를 획득하지 못했다고 생각함.

     

      이에 더하여 1920년대가 되면서 일본은 미국과 영국의 워싱턴 조약(Washington treaties)을 통해 일본의 해군 건설을 제한하고, 중국이 더 이상 일본의 유효한 지배 아래 놓이지 않도록 한 데 대해 항의했고 불만을 가지게 되었음. 이 때문에 일부 일본의 정책 수립자들은 일종의 국제주의적(internationalist) 정책을 표명함. 그러나 점차 군부가 정치에서 득세하기 시작함. 장교 집단, 특히 러-일 전쟁의 승리로 북부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의 장교들은 일본이 중국으로 팽창하도록 강력한 압박을 가함.

     

      또한 일본이 경험한 사회적 동요는 군국주의 입장을 강화시킴. 1923년 10만 명의 사망자와 대략 200만 가구의 파괴를 낳은 '관동대지진(the Great Kanto Earthquake)'과 대공황이 두 가지 큰 사회불안 사태였음. 대공황은 유럽에서처럼 우익 극단주의가 자라기 좋은 토양을 형성함. 대외 팽창주의가 보다 매력적으로 보였으며, 일본의 정치 및 군사지도자들로부터 아시아 '공영권(co-prosperity sphere)' 건설에 대한 발언이 증가함.

     

      이 '공영권'이라는 표현은 주변국들에 대한 일본의 경제적 패권을 위한 완곡한 수사였음. 또한 이러한 제국주의적 풍조에 불을 지핀 것은 '신토(しんとう, 神道)'라는 일본 민족 고유의 전통적인 신앙에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두고 있는 일본 민족주의의 고양이었음. 신토는 덴노의 존귀함과 절대성에 대한 믿음으로, 일본의 모든 시민은 황제에게 충성을 서약함.

     

      따라서 일본의 대외정책은 점차 단호해져 감. 1931년 만주 위기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신호탄으로 간주됨. 국제연맹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1932년 일본은 만주 전역에 만주국(Manchuguo)이라는 괴뢰국가를 건설함. 처음으로 한 회원국이 다른 회원국에 행한 뻔뻔스러운 공격행위에도 국제연맹이 보여준 반응은 김 빠진 것이었음.  대부분의 국가들이 만주국의 존재를 승인하진 않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도 이 괴뢰국은 존속했음. 그리고 일본은 1937년부터 중국과 전면전에 돌입했으며 이 역시 1945년까지 계속됨.

     

      영국의 얼 리턴(Earl Lytton)이 주재하는 위원회가 위기를 초래한 중-일 간의 최초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급파되었지만, 그 보고서를 작성하는데 1년이 걸렸고, 그러고서도 중재를 권고함. 또한 만주국의 불승인과 중-일 분쟁의 국제적 중재를 촉구했지만, 일본의 국제법 위반에 대한 어떠한 강압적 행위를 취하진 않음. 그렇다고 단호하게 대처했더라도 일본의 비롯한 전범국들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을까? 답은 '아니다'임.

     

      어떤 독재자도 국제법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음. 대다수의 역사가는 독일과 일본 모두 오랫동안 영토적 야심을 품고 있었고, 이 야심은 국제연맹이 만주 위기에 대해 단호한 조처를 취했더라도 막기 힘들었다는 것에 동의함. 그러나 연맹이 일본의 침략을 견제하는데 실패함으로써 일종의 양해적 분위기가 형성되고 맘. 게다가 이러한 분위기는 다른 유럽의 두 독재자들에게도 국제법을 위반하게 하는 대담성을 갖게 함.

     

      일본의 주변국 침략, 이른바 '동아시아 신질서(East Asia New Order)'가 가속화되는 순간 모든 서구 열강이 무관심했던 것은 아님. 미국은 중국 무역과 집중적인 가톨릭 전도활동에 깊이 연루되어 있었고, 일본의 중국 찬탈에 점차 동요하기 시작 힘. 다양한 조처를 취했지만 모두 실패하자, 미국의 태도는 더욱 대결적으로 한층 더 엄중한 경제 제재와 무역봉쇄 정책을 실행함. 1939년 미 행정부는 일본과의 1911년 무역협정을 파기함.

     

      그 결과 일본은 무기에 필요한 원료의 수입에 지장을 받았고, 특히 석유의 공급 제한은 큰 타격을 주었음. 하지만 일부 역사가들이 보기에 이 행동은 일본이 더 공격적으로 행동하도록 다소 고의적으로 압박하는 꼴이었음. 산업화된 경제에 결정적인 윤활유의 공급이 차단되자, 일본은 동남아에서 확보하는 길 외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됨.

     

      일본의 미국 본토 공격 전 미국 대통령은 그 전쟁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 싶었지만, 미국 시민들은 전쟁에 하등 관심이 없었음(Merrill and Paterson 1955: 127-84). 이 때문에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다른 의중을 가졌는지, 혹은 보복 공격을 어느 정도 알거나 묵시적으로 조장했는지는 역사가들의 논쟁거리임.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기습으로 대응한 것이라면, 미국과 영국은 12월 8일 일본에 대해 신속히 전쟁을 선포했으며, 독일과 이탈리아는 사흘 후 선전포고로 응수함.

    태평양 전쟁 연대기
    1930. 9. 18.     일본군과 중국 마적단 사이 만주 목단 사건 발발. 일본의 만주 점령 시작 신호.
    1933. 2. 24.     국제연맹, 리턴 보고서를 채택. 보고서는 중-일 문제에 국제 중재를 권고하고, 연맹회원국들이 만주국을 승인하지 않을 것을 재촉. 그러나 일본에 대한 제재는 모색하지 않음.
    1933. 3. 27.     일본의 국제연맹 탈퇴 선언.
    1934. 12. 29.   일본, 1922년 워싱턴 해군 조약 파기.
    1936. 1. 15.     일본, 런던 해군회의로부터 철수.
    1936. 11. 25.    독일과 일본, 반코민테른(Anti-Comintern) 협정 서명.
    1937. 7. 7.        일본과 중국 간의 전쟁 발발.
    1937. 11. 6.      이탈리아, 반코민테른 협정에 가담.
    1939. 6. 14.      일본, 중국 톈진 봉쇄 시작.
    1939. 7. 26.      미국, 일본과의 1911년 무역 조약 철회.
    1940. 8. 30.      일본, 인도차이나반도 북부 차지.
    1941. 4. 13.      일본, 소련과 중립 협정 조인.
    1941. 7. 21.      프랑스 비시(Vichy) 정부, 일본의 인도차이나 전체의 획득을 인정.
    1941. 7. 26.      미국, 일본 자산 동결.
    1941. 12. 7.      일본, 진주만의 미 해군기지 공격.
    1941. 12. 8.      영국과 미국, 대일 전쟁 선포.
    1941. 12. 11.    독일과 이탈리아, 대미 전쟁 선포.

     

      이렇게 제2차 세계대전은 지구 차원의 전쟁이 됨. 이후 일본과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 간의 추축이 형성되었고, 1940년 삼국 조약(Three-Power Pact)이 맺어졌으며, 1942년 군사동맹으로 변형됨. 그리고 결국 네덜란드와 프랑스가 나치 지배 하에 놓인 것처럼, 네덜란드의 동인도와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그리고 그 밖의 동아시아 국가들(한국)이 일본의 수중에 떨어짐. 또한 영국 자체는 독일의 침공을 저지했지만, 동남아시아 내 영국 식민지였던 버마와 스리랑카, 말레이시아는 독일의 수중에 떨어졌음.

     

      1930년 극동 위기가 심화되고 있을 때, 유럽은 연이은 위기를 겪음.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 원정, 독일의 라인란트 재무장, 스페인 내란,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 및 폴란드에 대해 순차적으로 이루어진 독일의 출병 등의 위기 상황이 발생했음. 결국 1939년 9월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대해 선전 포고함.

     

      많은 사람들에게 제2차 세계대전은 '히틀러의 전쟁'으로 기억되지만, 기원에는 많은 역사적 논쟁이 존재했음.

      '히틀러가 실제 전쟁을 계획했는가'부터 '영토적 야욕은 유럽의 지배였는지 세계 패권이었는지', '자서전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설정한 팽창주의적 야심을 실현하기 위한 시간계획표를 가지고 있었는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사용된 Hossbach Memorandum이라는 문서가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1937년 체코슬로바키아와 뒤이어 폴란드를 점령한 것은 히틀러의 결정이었는가', '히틀러는 큰 전쟁 없이 유럽 패권을 장악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가 혹은 전면전을 불가피하다 믿었는가', '독일 경제가 전쟁을 위해 완전히 가동될 수 있는 1940년대 이전 전면전이 발발할 것은 예측하지 못했는가' 등등.
      이 모든 물음은 역사가들이 제기한 것이었고, 해답은 다양하게 내려짐(Robertson 1971; Finney 1997).

     

      그중에서도 한 진지한 역사가가 전쟁의 기원에 관해 가장 논쟁적으로 다룸. 바로 1961년 발간한 테일러(A. J. P. Taylor)'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The Origins of the Second World War)'임. 이 책은 발간되자마자 비판 공세의 표적이 되었음. 이 격론의 원인은 히틀러가 근본적으로 유럽의 다른 정치가들과 다를 바 없다 한 테일러의 주장이었음. 나치 이데올로기는 '가스실의 악'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순 없지만, 전쟁을 설명하는데 충분함.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앞선 지도자처럼 단지 베르사유 조약 후 독일의 위상을 제고하고, 베르사유 전후처리의 불리하고 부당한 면을 역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것임. 팽창과 전면전을 위한 시간계획표를 갖기는커녕, 기회주의자였기에 남의 실수에 편승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유화론자들이 제공한 기회를 포착했음. 1939년 9월 발발한 전쟁은 히틀러에겐 본질적으로 충격이었음.

     

      테일러는 훗날 자신의 자서전에서 히틀러를 얼간이이자 기회주의자로 보는 자신의 관점이 새로운 정설이 되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다소 과장된 것임(Taylor 1983: 299).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히틀러가 장기적인 부동의 목표, 유럽 혹은 세계로의 팽창을 가졌으며, 이는 전술과 타이밍에서 단기적인 유연성과 합쳐진 것으로 믿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마 보다 진실에 가까울 것임.

     

      테일러를 제외한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나치와 파시스트 이데올로기를 전쟁의 기원가 실제를 이해하는 본질적인 요소로 간주함. 1919년 전후 처리에 대한 민중의 불만으로 배양된 극우 운동들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성장함.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낳은 사회-경제-정치적 불안을 먹고 자람.

     

    이탈리아의 경우

      먼저 이탈리아는 19세기 통일됐지만 안정된 중앙정부를 가져 본 적이 없었음. 파시스트 신화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무솔리니는 '로마 진군(March on Rome)'으로 권력을 장악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1922년 왕과 보수 정치가들의 부름에 따라 의회를 구성하기 위해 로마로 왔음. 전통 우익정당들이 안정된 정부를 구상하는데 실패했기 때문. 무솔리니는 진군은커녕, 특별열차를 타고 수도로 올라옴.

     

      일단 무솔리니는 수상이 되자마자 파시스트 혁명을 시작. 많은 역사가와 정치이론가들이 지적해왔듯, '파시즘'의 정의는 쉽지 않음. 너무 일관성이 없어서 결코 하나의 정치철학을 구성할 수 없음. 이탈리아에서 실행된 것처럼 파시즘은 흔히 말하는 '전체주의적(totalitarian)' 형태의 국가를 형성함.

     

      이러한 국가들에서 시민들의 삶은 거의 모든 면에서 규제에 간섭을 받음. 고용의 영역에서 노조는 폐지되고, 대신 파시스트 관료가 감독하는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조합(cor-porations)'이 만들어짐. 조화로운 노동관계라는 말로 아무리 정당화하더라도, '조합주의(corporatism)'는 실제로는 조직된 노동의 이익보다는 거대 이익을 앞세우려는 것이었음. 정치에서도 반대당이 제거되었고, '총통(Il Duce)' 무솔리니라는 인물 주위로 사적인 숭배자 무리가 형성됨. 사회생활은 여성조직들로부터 축구클럽과 청년연맹에 이르기까지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에 감염됨.

     

      파시스트 교리는 외교정책에도 영향을 미침. 파시즘은 사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국가들 사이에서도 폭력과 투쟁을 당연하고 영웅적인 것으로 칭송. 전쟁은 개인의 '인격'뿐만 아니라 일국의 성숙함과 국제 위계질서상의 지위도 시험하는 마지막 관문이었음. 따라서 무솔리니는 베르사유 전후처리에서 아드리아해의 이탈리아 영토를 앗아간 부분에 대해 교정하는데 진력함. 또한 그가 말하는 '신로마제국'을 필요하다면 전쟁을 통해서라도 북아프리카로 확장하고자 노력했음.

     

      분명한 표적은 아비시니아, 아프리카의 마지막 독립국가로, 1935년 이탈리아 군대는 하일레 셀라시에(Haile Selassie) 왕으로부터 전쟁을 개시했음. 이 전쟁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었고, 가장 분명한 이득을 본 사람은 무솔리니 자신이 아닌 아돌프 히틀러였음. 히틀러는 무솔리니의 북아프리카 모험을 보호막으로 자신의 팽창 계획을 진행시킴.


    독일의 경우

      히틀러는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가 부상한 지 10년이 조금 더 지나서 권좌에 오름. 가두투쟁과 맥주 저장실에서의 민중 선동으로 여러 해를 보낸 후, 히틀러의 민족사회주의 정당(National Socialist party)1933년 독일 총선에서 승리함. 히틀러 역시 무솔리니처럼 국가의 장악을 공고히 하기 위해 움직임. 국가가 산업을 지도하는 동시에, 대중매체를 장악함. 반대당은 소멸되고 의견 차이는 물리적 처벌이나 그 공포로 억압됨.

     

      유대인,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등은 집단수용소로 보내졌으며, 독일인의 생활에 나치당과 나치 이데올로기가 개입되지 않은 곳이 없었음. 출산과 자녀양육 같은 지극히 사생활적인 부분조차 제3제국의 명령에 구속됨. 심지어 제국의 더 큰 행복을 위해 유전적으로 순수한 아이의 출산이 권장되기도 함. 이 점은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매우 흡사했음. 무솔리니 역시 "모성은 여성들의 애국심"이라고 주장함(Mazower 1999: 82).

     

      그러나 나치즘은 인종학살을 수반한 반유대주의에서 보듯, 분명하고 더 격렬한 긴장상태를 연출함. 히틀러의 세계관의 중심에는 순수 독일인, 즉 아리안족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이 자리했음. 이는 보다 더 넓은 활동공간의 추구 속에서 아리안 독일인은 동유럽과 특히 소련에 거주하는 슬라브 열등 인종을 희생시켜, 동방으로 팽창함으로써 그 인종적-역사적 운명을 완성해야 한다는 망상이었음. 따라서 히틀러의 세계관에는 '적자 인종'이 유전적으로 열등한 이웃 민족들을 대가로 팽창하지 않을 수 없다는 변조된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과 우생학 또한 포함되어 있었음.

     

      나치는 영토적 야심을 숨기지 않았음. '나의 투쟁'은 히틀러의 인종관과 팽창주의 계획은 매우 노골적으로 기술함. 하지만 연합국 세력이 이를 막지 못한 것은, 1930년대 서유럽 열강들이 추구한 유화정책 때문. 전후 1세대 역사가들은 유화론자를 극도로 가혹하게 비판했는데 체임벌린(Chamberlain)그의 프랑스 측 대화 상대자들은 '뮌헨의 죄인들'이었음. 소심하게 히틀러를 달래기만 함으로써 프랑스와 영국 지도자들은 단순히 그의 입맛을 맞춰주었고, 이는 히틀러로 하여금 베르사유 조약을 대담하게 위반해도 성공하리라는 믿음을 갖게 만듦.

    유화정책(Appeasement)
      실지를 탈환하려는 국가 혹은 영토를 탐내는 국가에 대해 양보하는 정책으로, 다소 오건한 요구를 들어주면 그 국가의 팽창주의 성향이 완화될 것이라는 바람에 따른 것. 하지만 영국 수상 체임벌린(Neville Chamberlain)의 뮌헨 협정 사태 이후, 유화정책은 일반적으로 독재자들의 요구 앞에서 소심 해지는 것과 같은 의미로 통용됨. 이는 결국 이들의 공격적 기도를 무력화시키기는커녕 장려하게 되는 결과를 낳음.

     

      하지만 그다음 세대의 역사가들은 유화론자들에게 다소 동정적인 시각을 취함. 1930년대 서유럽 정책결정자들과 외교관들이 직면했던 국내외적 위기의 강도를 과소평가해서는 안됨. 당시 극동지역에서 주된 관심사는 일본 제국의 중국 주권 침해였음. 이 또한 히틀러가 1933년 제네바 군축회의와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독일 재무장의 길을 들어서는데 좋은 엄폐물이 됨. 또한 앞서 말했듯 이탈리아의 아비시니아 원정을 활용했고, 이후 그곳에서 계속되는 전쟁 기간 동안 약간의 무기를 보냈으나, 무솔리니에게 신뢰하기 어려운 동맹국이 되었음.

     

      1936년 독일과 이탈리아 간의 '로마-베를린 추축(Rome-Berlin Axis)'의 결성을 선언했으나, 정확히 말해 무솔리니의 전쟁을 오래 끌기 위한 것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북동아프리카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이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에 보다 많은 흠집을 내는 데 성공함. 게다가 국제연맹이 이탈리아에 대한 제재 여부 문제로 고군분투하는 사이, 스페인에선 내란이 발발함.

     

      이에 영국과 프랑스의 정치가들은 태평양(대 일본), 지중해(대 이탈리아), 중부 유럽(대 독일)으로, 전선이 3개나 되는 아찔한 전쟁 시나리오와 마주침. 게다가 이러한 사태에 대해 영국과 프랑스 그 어느 나라도 군사적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음. 대공황으로 인한 만성적인 실업과 궁핍 같은 국내문제가 더 시급한 상황이었기에, 전쟁에 돌입하는 것을 원치 않았음.

     

      따라서 일부 역사가들은 유화정책을 어떤 점에서 '시간을 벌기 위한' 정책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봄. 영국과 프랑스가 재무장에 착수하고 일반 여론은 동원할 수 있게 하는 사이, 만약 독일이 군사적으로 도발하거나 히틀러의 '평화의 사도' 이미지가 허위로 판명될 때 비로소 히틀러에 대한 군사적 대응을 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

     

      그러나 이는 너무 관대한 해석이라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존재. 이들은 독일인의 분노가 어느 정도 정당하다고 생각했고, 히틀러의 요구에 양보함으로써 평화를 원하는 한, 협상과 양보로 극복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 하지만 이는 나치의 저의를 과소평가한 결과, 1936년 히틀러가 다시 라인란트를 점령했지만 프랑스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음. 이에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에서 나치 운동을 독려했고, 오스트리아 총리 슈슈니크(Schuschunigg)에게 나치당원을 각료로 포함시키도록 압력을 가하는 등 대담하게 나아갔음.

     

      그리고 결국 히틀러는 1938년 3월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통일(합병)을 보장하기 위해 독일군을 국경으로 급파함. 다음은 체코슬로바키아로, 히틀러는 다시 주데텐란트의 350만 독일인을 신생 체코슬로바키아에 포함시킨 1919년의 처리가 부당하다고 당당히 거론함. 그리고 이후 1938년 5월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독일의 군사행동이 시작됨. 영국과 프랑스의 지도자들은 사태 발전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지했지만, 유화정책을 계속 고수했음.

     

      유화정책이 정점에 달한 것은 악명 높은 1938년 9월의 '뮌헨 협정'이었음. 뮌헨에 모인 영국과 프랑스 총리들은 독일의 주데텐란트 점령을 인정하고, 이에 따른 체코의 새로운 국경을 (이탈리아와 독일과 함께) 보장해줌. 히틀러 또한 체임벌린에게 영-독 양국은 "서로가 결코 전쟁하지 않을 것"이라 약속했지만, 이것이 체임벌린이 '우리 시대의 평화'를 보장해주리라고 주장한 그 유명한 종잇조각임.

     

      모두 알다시피 평화는 보장되지 않았고, 1939년 3월 독일은 나머지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했고, 뮌헨에서의 약속을 파기함. 그러나 중부 유럽 전체에 대한 독일의 유효한 점령이 진행되는 가운데, 서유럽 강국들은 동유럽과 발칸의 나머지 자유국가의 독립 보장을 대대적으로 약속함. 이렇게 갑작스러운 외교 혁명은 아마도 유화정책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결국 1939년 9월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를 침공한 히틀러를 상대로 전쟁을 결정함.

    유럽에서의 제2차 세계대전 연대기
    1922. 10. 30.    무솔리니, 이탈리아 총리가 됨.
    1933. 1. 30.      히틀러, 독일 총리가 됨.
    1933. 10. 14.    독일, 제네바 군축회의 불참, 이후 국제연맹도 탈퇴.
    1934. 6. 14-15. 히틀러와 무솔리니, 베네치아에서 회담.
    1934. 7. 25.      오스트리아 총리 돌푸스(Dollfuss), 오스트리아 나치당원에 의해 암살.
    1935. 3. 16.      독일, 징병제 부활.
    1935. 10. 3.      이탈리아, 아비시니아 원정.
    1935. 10. 11.    국제연맹, 이탈리아에 대한 제재 부과 결정.
    1936. 3. 7.        독일, 라인란트 재점령.
    1936. 5. 9.        이탈리아, 아비시니아 병합.
    1936. 7. 17.      스페인, 프랑코의 파시스트 세력과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노동조합주의자들의 인민전선 간의 내란 발발.
    1936. 11. 1.      무솔리니, 로마-베를린 추축 결성 선언.
    1937. 12. 11.    이탈리아, 국제연맹 탈퇴.
    1938. 3. 13.      오스트리아, 독일과 통일(합병)
    1938. 5. 20.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군사행동 소문.
    1938. 9. 15.      영국의 체임벌린 총리, 베르흐테스가덴에서 히틀러와 회담.
    1938. 9. 22.      체임벌린과 히틀러, 고데스부르크에서 회담.
    1938. 9. 29-30. 뮌헨 회의.
    1939. 3. 28.      스페인 내란 종결.
    1939. 3. 31.      영국과 프랑스, 독일이 잔존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후 독일의 침공으로부터 폴란드 영토 보전을 위한 지원 약속.
    1939. 4. 17.      소련, 영국과 프랑스에 동맹 제안.
    1939. 5. 22.      이탈리아와 독일, 강철 조약 체결.
    1939. 8. 12.      영국과 프랑스, 소련과 군사회담 시작.
    1939. 8. 23.      스탈린, 나치-소비에트 조약 서명.
    1939. 8. 25.      영국, 폴란드와 조약 체결.
    1939. 9. 1.        독일, 폴란드 침공. 이탈리아는 중립 유지.
    1939. 9. 3.        영국과 프랑스, 대독일 선전포고.
    1939. 9. 17.      소련, 폴란드 침공.
    1939. 11. 30.    소련, 핀란드 침공.
    1940. 4. 9.        독일, 덴마크 및 노르웨이 침공.
    1940. 6. 22.      이탈리아, 전쟁 참가.
    1941. 6. 22.      독일, 소련 침공.
    1941. 12. 8.      미국, 전쟁 참가.

    지구 역사의 이론화 : 1900~1945

      이렇게 유럽의 쇠퇴와 미국의 지도력 신장에 따른 지구 시스템의 재조정이 발생함. 지금까지 외교사가 통상적으로 견지하고 있는 국가 중심 접근법(state-centred approach)을 통해 살펴봄. 이 접근법은 정치적-경제적 권력 이동을 강조하는 한편, 대공화의 파장 속 일시적으로 고착화된 모순에 직면한 지구 경제에서 각 국민 경제들의 상호 연계성에 주목함. 물론 그 어떤 역사 시기와 마찬가지로, 저자의 인식론적 태도와 이론적 기호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기술되고 설명될 수 있음. 지금부터는 국제관계론(International Relations)의 세 가지 이론적 전통들이 각각 이 기간의 사건을 어떤 식으로 구성하는지 요약해보고자 함.

     

    현실주의

      1900~1945년 시기를 해석하는 일은 카(E. H. Carr)'20년의 위기(The Twenty Years' Crisis)'(1939) 모겐소(Hans Morgenthau)의 '국가들 사이의 정치(Politics Among Nations)'(1948) 같은 현실주의 전통(Realist tradition)과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는 교과서들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함. 현실주의자들은 국가이익들(national interests) 간의 영원한 괴리를 이해할 필요(대외팽창을 통해 권력을 극대화하려는 국가들의 동태적 충동을 감안할 때)를 강조하면서, 이 시기를 자신들의 접근법이 옳다는 것이 자명해지는 시기로 인식함.

      "모든 전쟁을 종결짓기 위한 전쟁"이 끝난 후 세계 평화를 진작시키려 한 이상주의자(idealist)의 열망은 예상한 대로 완전히 수포로 돌아갔다. 윌슨의 국제연맹의 토대는 그 어떤 지구 차원의 집단이익의 관념보다는 자국 이익(national self-interest)의 계산을 항상 우선 하는 국가들이었다. 따라서 권력정치(power politics)에 오명을 씌우려는 자유주의 국제주의자들(Liberal internationalists)의 기도는 순진하게 오도된 것이다(Carr 1939: 103).

     

       만약 정치가 "어떤 의미에선 항상 권력정치"라면 두 번의 세계대전을 설명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 현실주의 관점에서 보자면, 세계 정치의 무정부적 성격 때문에 전쟁은 일탈 현상이 아닌 인간 삶의 전형적인 조건으로 인식됨. 그리고 이데올로기와 여론은 특정 국가가 특정 시기에 추구하는 외교정책의 구체적 국면을 설명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수행.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분석 문제는 국제체제(International system) 내 구조와 권력 분배에 있음.

     

      따라서 현실주의자들에게 유럽의 오랜 위기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는 세력 균형이 본질적으로 파괴되었다는 데 존재함. 이는 처음 19세기 말 독일 통이로, 나중에는 경쟁국들을 추월하려는 독일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야기되었음. 이들 모두 국부를 최대화하려 했고 이를 위해 군사-영토-제국주의-통상 등의 상황을 가장 유리하게 확보하기 위해 노력함.


    자유주의-이상주의

      자유주의 전통(Liberal tradition)에 따르면, 비록 인간은 마치 협력을 모른 존재처럼 행동하는 국가들 속에 갇혀있다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인간은 '협력적인 피조물'임. 이러한 자유주의 전통은 같은 기간 속 전혀 다른 의미를 발견함. 비록 국제기구의 시도가 실패로 끝났지만, 국제주의(internationalism)라는 보다 더 긍정적인 신호를 발견함.

     

      자유주의자는 1900~1945년을 종종 고립주의(isolationism)대외 배척의 민족주의(nationalism)가 세계 대부분에서 확대되는 기간으로 간주. '주의(-isms)'라는 것은 신중하게 다루어야 하지만, 자유주의자들은 현실주의자들보다 아이디어의 영역에 보다 더 큰 의미를 부여함. 분명한 것은 국가 하위 수준(sub-state level)에서 사람들은 국경을 초월하여 연결시키는 다른 관념화 세력들도 작동했다는 것. 대륙을 연결하는 통신과 교통의 밀도가 증가일로에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아이디어들이 사람과 물건에 따라 유통되고 초국가적 사회-정치 운동(transnational social and political movements)이 심화되었음(Iriye 1997).

     

      결국, 국내에서 인종 혼합과 계급 억압에 대항하는 급진적 아프리카-아메리카 행동주의자들은 아프리카와 카리브 연안 그리고 아시아에서 식민지화 정책에 투쟁하는 반제국주의자들과 공통의 대의를 발견함. 인도의 민족주의자들은 반제국주의 전술의 정신적 태세와 실천적 길잡이를 1919년 아일랜드 공화국의 전통에서 배움. 또한 마찬가지로 여성참정권론과 이를 신봉하는 여성들이 대서양을 일주하고 그 너머로 나아감.

     

      따라서 1930년대에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조가 민족주의 운동 속에서 뿐만 아니라, 만성적으로 사회 정의와 경제 평등(equity)을 도출할 수 없는 자본주의 체제로의 급속한 전환을 추구하는 많은 산업화된 국가들 사이에서도 상당한 지지를 얻음.


    세계체제론

      세계체제론(world systems theory)은 지리적으로 구분된 세계의 지역들을 하나로 묶는 중심 구조로 500년 이상 발전해온 지구 자본주의 경제에 주목. 이 체제는 산업화도니 부유한 중심(core)과 착취당하는 저개발된 주변(periphery)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기능적이고 위계적인 노동 분화(division of labour)로 특징지어짐. 중심은 주변으로부터 자산들(저임노동, 원자재 혹은 다른 형태의 잉여 등)을 지속적으로 착취함.

     

      하지만 역사과정을 극도로 긴 주기로 본다는 점에서, 세계체제론자는 1900~1945년의 기간을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특별한 시기로 인식하지 않음. 오히려 지오반니 아리기(Giovanni Arrighi) '긴 20세기(The Long Twentieth Century)'에서 서술한 내용에 따르면, 20세기 전반은 위기가 지속되는 가장 혼란스러운 단계로 볼 수 있음. 이 단계에서 지구 자본주의 체제의 헤게모니가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동했고, 이 과정은 이미 1890년대 진행됨.

     

      그러나 중세 제노바에서 금융자본이 융성한 이레 네 차례의 패권 이전(hegemonic succession) 중 그 어떤 패권 이전도 급속히 나타나지는 않음. 한 도시나 국가에서 다른 도시나 국가로의 리더십 이동 역시 엄청난 혼란을 수반함. 왜냐하면 자본주의(Capitalism)는 불안정을 유발하는 속성을 내재하고 있으며, 과잉축적의 위기들로 그 발전이 중단되기 때문. 따라서 체제위기는 주기적으로 발생하는데, 한번 꽃이 핀 금융자본 단계는 내부적으로 폭발을 일으켜 초국가적 혼돈(transnationalized chaos)으로 귀결됨. 

     

      이 폭발은 체제가 가지고 있는 다층적인 모순에 의해 일어나지만, 새로운 패권구도 아래 자본주의를 지속적으로 재생시킨다는 점에서 필요한 과정임. 따라서 전간기(inter-war period)에 미국 금융자본은 전쟁의 확대로 체제과 완전히 붕괴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과는 무관하게 유럽 내 자본주의 경쟁에서 이득을 취할 기회를 엿보고, 유럽 정치의 군사화에 따른 부담을 떠맡았음. 실로 지구적 재앙이 발생했을 때, 실제로 일어난 것은 미국의 자본 손실이 아닌 미국의 패권이 분명 해지는 것이었음.

     

      미국은 전쟁을 계기로 상대적-절대적 측면에서 공고히 그 경제적 위상을 강화함으로써 유일한 주역으로 등장함. 유럽에서 독일군(Wehrmacht)을 쳐부술 부담은 소련이 져야 했지만, 소련이 전쟁에 기여한 것은 미국의 차관 덕분이었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억 달러가 서유럽과 일본의 재건에 투입될 결과, 지구 경제에서의 미국의 우월적 지위(primacy)가 확보되고 확연히 발휘되었음.


    맺음말

      다소 거리를 두고 보면, 지난 세기의 전반부는 압도적으로 파편화되고 분열 생식하는 시리고 여겨짐. 따라서 어떤 점에선 이 기간은 '탈지구화(deglobalization)'의 시기로 간주될 수 있음. 이후 냉전기를 거치면서 이 시기 동안 해체의 경향이 분명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현재 지구화와 동일시하는 많은 현상의 뚜렷한 증거를 찾을 수 있음.

     

      실제로 이언 클라트(Ian Clark)가 주장한 대로, 지구화와 파편화(fragmentation)는 서로가 안티테제(antitheses)가 아니라 오히려 서로 변증법적 관계에 있음. 즉, 대공황이 그랬던 것처럼 연계성(connectedness)비대칭적인 상호의존(co-dependencies)으로 인해 긴장과 반작용이 일어나고, 또한 표면상 국지적인 위기들이 공간을 넘어 급속도로 확대될 가능성이 생기는 것(Clark 1997).

     

      그 증거로 통신과 운송에서 시공의 압축 양식들(time and space compressing modes)이 20세기 전반기 급속도로 확대되면서 라디오와 시네마가 전성기를 구가했음. 소련은 1920년대 말 이미 국제 라디오 방송을 개척했고, 그 직후 BBC 해외 방송이 대열에 합류했음. 또한 할리우드 영화들이 누린 유럽 관객들의 인기는 증가일로에 있었고, 히틀러 또한 디즈니 만화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혼자 감상하면서도 영화관 상영은 금지했음. 마치 소련이 미국의 재즈와 스윙 음악 같은 규제를 침해하는 수입품들에 경계심을 품으면서도, 국영공장에서는 미국 스타일인 포드식(Fordist) 생산기술을 도입한 것과 마찬가지.

     

      미국 생활방식에 대한 찬미를 확산시키는 데는 소비문화의 수출이 통상적인 외교보다 한층 효과적이라는 것이 일부 미국 비평가들이 가졌던 느낌인데, 문화적 보호주의 조치들은 이를 확인해줬음(Rosenberg 1999). 만약 비우호적인 국가가 경계심을 보인다면, 이는 분명히 미국 생활방식의 모방 풍조와 소비자 중심주의자들의 '자유'에 필수적인 물건들에 대한 욕구를 자극하는 영화의 힘을 반등하는 것.

     

      미래에 어느 정도까지 비미국인들이 미국 정책에 대한 즉각적인 찬성으로 이어질지는 여전히 논쟁거리지만, 훗날 '문화제국주의(cultural imperialism)'라 부르는 것의 기원을 달러 외교가 이루어진 양차 대전 사이의 시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

     

      더욱 편리하고 빠르게 지구를 횡단할 수 있는 능력은 문화-소비에만 국한되지 않음. 인간에도 해당됨. 여행은 물론,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찾으려는 이주민, 그리고 제국주의 열강의 희생자들도 포함됨. 대표적으로 영국 혼자서만 300만 이상의 인디언을 농업 노동자로 트리니다드, 가이아나 그리고 피지로 이주시켰음. 일본 제국 또한 역시 한국으로부터 엄청난 강제노역, 특히 위안부들(comfort women)을 포함해 한반도 밖으로 내보냈음(Ponting 1998: 46~7).

     

      제국주의와 전쟁이 지구화의 핵심 엔진이었던 한, 그리고 비록 형태를 바꾸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핵심 엔진으로 작동하는 한, 1900~1945년은 지구화 지지 세력의 더욱 근시안적이고 낙관적인 시각을 교정하는 바람직한 역할도 일부 담당함. 세계가 단일 공간(single space)이 되는 것은 매우 긴 과정임. 이 과정은 세계체제론의 다양한 견해에 의하면 400년 혹은 4000년이 걸림. 1930년대 자급자족(autarky) 경제로 후퇴한 데서 보듯, 상호 연계성은 탄탄한 직선을 따라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발작적으로 진행됨.

     

      결국 지구화가 되기 위해 세계가 좁다는 것에 대한 개인적 인식이 필요하다면(Roland Robertson 1992), 이 인식은 종종 구체적 폭력에 의해 이루어 짐. 지방과 개인의 자율성을 박탈하는 만큼 지구가 축소되는 것은 아님.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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